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문단 편집) === 유머 넘치는 젊은 신부님 === 호세마리아는 로그로뇨 신학교에서 [[사제]]직을 위한 과정을 시작했고, 1920년 사라고사에 있는 교황청립 신학대학에 들어가 사제품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제의와 장상의 허락으로 사라고사의 대학에서 시민법도 함께 전공하였다. 그의 관대하고 활기 있는 성품과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정직하고 침착한 성격은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경건한 생활은 동료들에게조차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학문적 열정 또한 동료 신학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22년, 20살의 나이에 사라고사 대주교에 의해 신학교의 감독 또는 학사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보냈고, 이는 그의 영성생활이 [[미사|성체성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매일같이 기둥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찾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성모님께 전구하였다. 1924년 11월 27일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했고, 그해 12월 [[부제(성직자)|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3월 28일 사라고사의 성 가롤로 신학교 성당에서 디아스 고마라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틀 후 그는 기둥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경당에서 첫 번째 장엄[[미사]]를 집전하였고, 3월 31일에는 보좌신부로 발령받은 교구의 작은 시골마을인 페르디게라로 이동하였다. 1927년 4월 소속 교구장 [[대주교]]의 승인을 받고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이 학위는 스페인 수도에 있는 중앙 대학에 의해서만 주어졌었다. 마드리드에서 그의 사도적 열정은 그를 다양한 계층의 학생, 예술가, 노동자, 학자, 사제들과의 만남에로 인도했고, 많은 시간을 어린이들과 도시 외곽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내게 했다. 동시에 호세마리아는 어머니와 젊은 동생을 키우기 위해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법률을 가르치며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여동생, 어린 남동생을 부양하기 위해서 사목을 안할 때는 학원에서 법학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어야 했다. 교구의 지원과 미사 봉헌금으로는 부족했다. 이 당시 성심의 사도 자매회가 운영하는 복지기관인 환자재단의 지도신부로 사목하면서 도시 빈민들과 병원의 불치병 환자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목하였다. 그 당시를 회상하며 호세마리아는 가진 건 '유머' 밖에 없는 혈기와 열정 넘치는 사제였다고 회고하곤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